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베이 말름스틴 (문단 편집) == 음악 활동 == 1982년, 지금은 [[프로그레시브 메탈]]계에 매진하고 있는 유명한 락 제작자 마이크 바니에게 자신의 데모 테입을 보냈고, 마이크 바니[* 쉬라프넬 레코드사 사장으로, 제이슨 베커를 발굴해서 [[마티 프리드먼]]에게 소개시켜준 후 캐코포니의 앨범을 제작했고, 그 외에 그렉 하우, 크레이그 골디, 글렌 휴즈, 조지 린치, 비니 무어, 토니 매컬파인, 제이크 리, 폴 길버트, Racer X 등 7-80년대 메탈씬의 1/4은 그를 거쳐갔다.]는 그의 재능을 인정, 그를 미국에 불러들인다. 사실 잉베이는 어떻게 보면 모두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란걸 명확하게 이뤄낸 이민자이다. 마이크 바니에게 뽑혀서 미국으로 간 뒤에는 1주일만에 수퍼 스타, 초신성, 요주의할 신인으로 단 한번에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이라 할만 하다. 그래서 간혹 인터뷰에서 보면 미국을 거지 같은 나라라고 까는 이들한테 하는 말이 '이 나라가 얼마나 기회와 희망의 나라인지 인지못한다'라며 비판했다. 메탈계 거물급 프로듀서 마이크 바니가 스웨덴까지 와서 그의 기타실력을 보고 그를 데려갔으니 잉베이 입장에선 기회와 희망의 나라라고 할 법도 하다. 데뷔 후에도 하루에 3시간은 연습한다고[* 하루에 연습하는 3시간은 실전처럼 연습하는 시간으로 보인다. 보컬이었던 [[팀 리퍼 오웬스]]가 [[http://www.blabbermouth.net/news/tim-ripper-owens-why-i-quit-yngwie-malmsteens-band/|인터뷰(링크)]]에서 잉베이 주위에는 항상 기타가 있고 수시로 연주를 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기타리스트보다도 기타 연주 자체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밝힌 적이 있다. 잉베이는 처음엔 Steeler라는 밴드에 가입했지만 사실은 녹음이 다 완결된 뒤에 기타 파트만 오버더빙으로 들어간 것이라 정식 멤버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때문에 잘 들어보면 곡과 기타 연주가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하다. [youtube(go582lMotR4)] 그 뒤 레인보우 및 MSG를 거쳐 온 명 보컬리스트 [[그레이엄 보넷]]에게 오디션을 받고 [[알카트라즈(밴드)]]의 기타리스트로 가입, 밴드의 데뷔작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을 내면서 사실상 최초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이 앨범은 매우 훌륭한 앨범인데, 완전히 속주에 함몰되지 않고 락적인 템포에 충실한 잉베이의 기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데다가, 당시 최고의 기량에 도달한 그레험 보넷의 열차화통같은 쩌렁쩌렁한 파워풀한 목소리도 큰 매력을 말한다. 특히 이 앨범은 사실상 잉베이가 직접 작곡을해 성공시킨 첫 앨범이기에 스스로도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상쾌한 Island in the Sun, 박진감 넘치는 리듬파트와 솔로가 돋보이는 jet to jet 비장한 인트로와 소름돋는 솔로가 일품인 kree nakoorie, 구슬픈 분위기의 suffer me 등등 어느하나 버릴 곡이 없는 매우 훌륭한 앨범이다. 일본에서 라이브를 한 영상도 있는데, 잉베이의 팬이라면 84년 도쿄 라이브는 꼭 보자. 하지만 리더인 보넷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과의 의 불화로 잉베이는 두번째 앨범을 낸 뒤[* 라이브 편집반이므로 실제로는 앨범 한 장 만들고 나간 셈], Alcatrazz 에서 쫒겨났다. 후에 잉베이는 인터뷰에서 Alcatrazz 공연이 끝나고 보넷이 "That kid stole my show" 라며 화를 냈다고 했다. 많은 밴드가 보컬이 리더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공연의 인기를 새파랗게 어린 기타리스트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인기를 독차지하며 무대를 장악하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열등감도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그레이엄 보넷]]의 인터뷰는 다르다. [[리치 블랙모어]]를 연상케 하는 외모와 플레이, 모든 레인보우의 곡을 줄줄 꽤고 있는 잉베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잉베이 자체가 너무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자기 파트가 아님에도 휘젓고 돌아다니고, 노래 부르고 있는데 의미없는 애드립을 남발하며 나대기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에게 여러 번 경고 했지만 들어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무대에서 잉베이 솔로 중 기타 코드가 [[그레이엄 보넷]]의 발에 걸려 뽑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실수라고 사과하는 리더이며 대선배인 [[그레이엄 보넷]]에게 불같이 대들다가 결국 잘렸다는 것이다. 사실 [[그레이엄 보넷]]은 그 후 [[임펠리테리]] 밴드의 리더가 아닌 멤버로서도 잘 지낸 걸 보면 나이 어린 기타키즈에게 열등감 같은 걸 가질만한 인물은 아닌것 같고, 잉베이의 선천적 무례함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어찌 됐든 일찌감찌 이들은 무대 뒤에서 불화가 있었고 이후 잉베이는 자칭 탈퇴, 사실상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잉베이는 자서전에서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특히 그레이엄 보넷의 목소리는 정말로 훌륭하지만 술에 쩌들어 라이브도 잘 못하거나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심지어 기타코드를 누군가 고의로 뽑아 놓았다고 기억한다고 섰다.] 그 후 자신의 솔로 밴드를 결성하고 역사적인 앨범 [[Rising Force]]를 발매한다.[* 아마 시절 사용했던 밴드명] Rising Force의 발매는 전 세계 락 기타계를 뒤흔드는 쇼킹한 사건이었으며, Guitar Player Magazine에서 최고의 락 앨범 상을 수상하고, 그래미상에서도 최고의 락 연주부분에 노미네이트 된다. 그리고 올해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선정되어 기타플레이어 표지에 밴 헤일런과 더불어 최고의 기타리스트 모델로 장식되며 그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 앨범은 [[알카트라즈]] 시절 그의 존재를 확실히 알아본 일본에서 추진한 프로젝트로 연주곡으로만 원래 이뤄질 앨범이었는데 요청으로 보컬곡이 2개가 들어갔고 알카트라즈와 불화 이후 이 앨범에 매진하며 발매가 되었고 일본 유일 발매가 아니라 세계로 뻗어가며 갑자기 이 앨범이 1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황금시대가 개막된다. [youtube(y16UkdXQLgA)] 전성기 시절인 1985년 Rising Force 일본 라이브. I'll See the Light Tonight[* 옌스 요한슨의 인트로가 추가되어, 본 노래는 4분쯤부터 나온다. 보컬리스트는 이후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는 제프 스캇 소토.] 본격 1집 Marching Out으로 전 세계에 충격과 제대로 된 신고식을 확실히 치르게 된다. 단숨에 수퍼 히어로가 된 그는 이후 계속해서 멤버 교체라는 난재에 부딪히게 된다. 제프와는 관계도 좋고 상당히 잘 지냈지만 당시 제프는 [[루디 사조]]와의 프로젝트를 위해 떠나버렸고 2집 Triology에선 [[마크 볼즈]]와 함께 하게 된다. Trilogy 역시 수많은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대표곡이 포진되어 있고 좋은 평을 받는다. 잉베이는 마크의 실력이 상당히 출중해 마음에 들어했지만 점점 행동이 이상해 졌으며 끝내 박자, 음이탈등 심각한 상황이 연출되며 투어 중간 해고를 하게 된다. 이때 투어는 결국 제프가 임시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3집 [[Odyssey]]가 발매되었을 1988년 당시 [[바로크 메탈]] (현재는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선구자이자 대명사였던 그의 속칭 '웅장하면서도 진중한 바로크 클래식 느낌'의 작품과 거리가 멀어진 흔한 헤비메탈 사운드에 실망한 팬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일부 팬들은 기존의 Risign Force, Marching Out, 그리고 Triology을 초창기 3부작으로 칭하며 진정한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명반들로 꼽기도 한다. 3집 작업을 위해 매니저와 논의를 하던 중 "요새 [[조 린 터너]] 형은 뭐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매니저가 "전화 해 볼게."하며 다시금 [[레인보우(영국 밴드)|레인보우]]출신의 보컬과 함께하게 된다.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지만 실제로 잉베이는 이 앨범을 굉장히 별로라 생각하며 심지어 애착도 별로 안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장 노력을 덜 들인 앨범 중 하나라고 한다. 이때도 보컬 조와 불화가 일게 되는데 잉베이에 따르면 앨범 녹음 당시 이미 모든것이 다 완성된 상황이었고 조는 그저 가사 몇가지 바꾼것 뿐인데 여기저기 인터뷰에서 마치 자신이 가사를 다 쓴 것처럼 하고 다녀 상당히 기분나뻤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조의 목소리는 너무나 Commercial하다. 그리고 추임새 Oooo baby, 같은 것들이 오글거린다. 우리 메탈밴드인데!"라고 하는 등 안 좋은 이야기가 많다. 암튼 사실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인 Odyssey가 1988년 탄생하며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스스로는 가장 안 좋아하는 앨범이라고 한다. 이유는 모든 것을 본인이 키를 쥐고 움직이는 스타일인데 이때 잡음도 많았고 어머니의 암투병 및 사망. 아래 언급되는 87년도 교통사고에 의한 팔부상, 형의 사고사 등 고통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더 가관인건 이때 잉베이는 비로소 자신의 금전적 상황을 알게 되는데 말 그대로 매니저의 농락으로 거지였다. 이때 새 매니저와 만나고 그의인생은 다시 역전한다. 이후 1989년에는 이혼한 아버지의[* 군인이었고 어느날 러시아어를 공부하더니 구 소련에서 일하고 있더란다. 알고보니 스파이었다나 뭐라나.] 제안으로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냉전시대 꿈꾸기도 힘든 소련 라이브. 이때 잉베이의 앨범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그에 힘입어 바로 레닌그라드 라이브를 감행하게 된다. 꽤나 성공적인 공연을 했고 이후 앨범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이 라이브에 대해서 잉베이는 "사실 서방국가 출신 음악가들 중 최초의 구 소련 라이브 하면 사람들이 [[모스크바 음악 평화축제]]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라이브가 사실상 최초이다."라고 말한다.[* Yngwie Malmsteen: Relentless: The Memoir 잉베이 자서전] 오른팔을 2번 다친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서 오른팔을 평생 못쓸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재활 및 복귀를 성공하였다. 그 다음은 첫번째 아내와 결혼 전, 아내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과 잉베이를 헤어지게 하기위해 경찰에 허위신고를 하여 체포되는 과정에서 또 한번 팔을 다치게 된다.[* 과잉진압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이 어머니라는 작자가 잉베이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어 협박했었다고 신고했다. 그래서 경찰들은 무장을 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과잉진압을 한 것. 첫번째 아내와 결혼은 하였지만 결국 이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